감찰공 휘 제영(齊英) 묘소(墓所)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공은 귀손(龜孫)의 차남으로 자는 공망(公望)이다. 어려서부터 효심과 우애가 지극하고 문학에 재주가 있어 1528년(중종23년) 진사 시험에 2등 8위(100명중)로 합격 하였다.

 

1537년(중종32년) 4월 10일 조선왕조 중종실록에 임금과 이조참판 허항(許沆)의 문답에서 민제인(閔齊仁)을 제주목사로 발령하면 73세의 부모 봉양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임금이 제인의 형제 상황을 하문(下問)하자 참판 허항이 답변하기를 “제인의 동생 제영이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종9품)의 벼슬을 하고 있다”고 답변하였다(...有弟齊英今爲昭格署參奉矣...) 제영은 그 후 군기시주부로서 당진 현감까지 하였다.

 

천품이 우아하고 마음이 너그러워 사양을 잘 하고 벼슬을 탐탁히 여기지 않더니, 1548년 형 제인(齊仁)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자 동생인 제영도 통진현감에서 파직되어 귀향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3대 명종편에 의하면, 을사사화와 연계되어 1548년(명종3년) 좌찬성 제인이 삭탈관직 되면서 동생 제영도 귀향하고 있을 때, 과거 입암공(제인)과 가까이 지내던 이조판서 허자(許磁)가, 제인이 의식(衣食)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어려운 처지를 전해 듣고 동생 제영을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종6품:唐津邑誌 邑先生案 근거)로서 80이 넘은 노모를 좀 더 가까이에서 봉양토록 당진현감(종6품)으로 서용(叙用:복권 임용)하였다.(조선왕조실록에 ...罪人收叙子弟以爲傍倅 閔齊英以通津縣監 見罷未夂 以爲齊仁之弟 卽授唐津 時齊仁之母在公州 距唐津不遠...)

 

1550년(명종5년) 제영 당진현감을 입암공과 형제간이고 허자의 잘못된 서용이라 하여 다시 파직 되었다.( ...唐津縣監閔齊英以罪人親弟爲許磁等取收用物情極爲未便不可仍在其職請罷荅曰皆如啓...)

 

휘 제영의 차남 민사굉(閔思宏)은 선조3년(1570년:44세) 식년 진사시험에 합격(3등34위)한 진사로, 사굉의 사마방목(司馬榜目:생원 진사 시험의 합격자 명단)에 보면 합격 당시 부친 제영은 이미 졸하였고(영감하永感下), 관직이 당진현감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802년에 제작된 여흥민씨족보에도 민제영의 관직은 당진현감으로 되어 있다.(...齊英字公望唐津縣監贈掌樂正...

 

그런데 20세기에 만든 여흥민씨세보나 당진공(감찰공)파보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는 다르다. 당시에 인사권을 갖고 있던 간신 무리들이 고의적으로 사헌부 감찰보다 직급이 낮은 당진 현감으로 강등(降等:낮게) 발령 했으므로 휘 제영은 당진에 부임하지 않고 낙향했다고 되어 있으나 근거 자료의 미확인으로 공의 행적에 혼란이 있다. 민정중의 노봉집 민수비문(閔粹碑文)에는 휘 제영의 관직을 감찰(監察)로 기록하였으나 전거는 알 수 없다.

 

휘 제영은 귀향한 후 자연을 벗 삼아 감상하고 즐기면서 덕성을 함양하고 소요자적 하였다.

휘 제영의 계자유훈(誡子遺訓:자식을 가르치기 위하여 남긴 교훈)에,

    불급어구사이(不汲於求仕而)  벼슬을 구하려 급급하지 말고  

    유우학업미성(唯憂學業未成)  오직 학업이 부족함을 걱정하라

    불행어참정이(不倖於參政而)  벼슬에 오르려고 요행을 바라지 말고

    유환효충미진(唯患孝忠未盡)  오직효행과 충성이 미흡함을 근심하라

그리고 이모지훈(貽謀之訓:자손을 위하여 조상이 남긴 교훈)에,

    봉선세 돈가족(奉先世 敦家族)  조상을 극진히 섬기고 가족과 돈독하고

    면학업 독효우(勉學業 篤孝友)  학업을 부지런히 하고 효행과 우애를 두터이 하고

    절치려 과기욕(絶侈麗 寡嗜慾)  화려하게 사치하지 말고 욕심을 줄여라

하였으니, 그 근본은 당파싸움이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이나 승진에 힘쓰지 말고 먼저 덕행을 닦아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사회와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였으니 자손들은 그 어진 뜻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휘 제영은 손자인 동중추(종2품) 여숙(汝淑)의 벼슬로 통정대부 장악원정(通政大夫掌樂院正: 정3품)에 증직 되었다. 증직은 죽은 뒤에 관직을 부여하는 것으로 종2품 이상인 문무관에게는 그의 3대를 추증하였다. 부모는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는 한 단계 낮은 품계, 증조부모는 본인보다 두 단계 낮은 품계를 추증하였다.

 

휘 제영의 기일은 음력 10월 27일이며, 묘소가 처음에는 삼정동 선영아래 좌측 기슭으로 운촌공인 부사 여검(汝儉)과 부사의 장남 언시공 민평(閔枰)의 묘소 아래쪽에(酉坐) 있었다. 형인 제인의 초장지가 동생 제영의 초장지가 되었다. 즉 형의 묘를 삼정동에서 아들 사용이 남양주 명우리로 이장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동생 제영의 무덤을 쓴 것이다. 그러나 대청댐 건설로 말미암아 묘소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8년(무오) 3월 28일 여흥민씨 호동.삼정동 묘소관리위원회로부터 이장비 40만원을 받아  삼정동에 있는 아버지 전적공 묘소 우측(향하여 좌측)에 건좌로 이장하였다.

 

형 제인이 1549년 7월에 졸하여 대전 삼정동에 장사하였는데, 9년 후인 1558년에 아들 사용이 남양주 명우리로 이장하였으니 아우 제영이 졸한 것은 최소한 1558년 이후임이 틀림없다.

묘비가 오래되어 음기(陰記)가 없으므로 1833년(壬辰) 5월에 대사헌 송치규(宋穉圭)가 짓고 11대손 경용(景鏞)이 쓴 비를 세웠다

 

증숙부인(당상관 정3품) 연안김씨(延安金氏: 司圃奉事 石璘의 딸)는 4남 3녀를 두고 남편 휘 제영보다 먼저 별세하여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서어정에 건좌로 수장(壽藏)하였으나, 1987년(丁卯) 8월 27일 대전 대덕구 삼정동 부군(제영)의 묘에 이장합폄 하였다. 묘비문에 숙인으로 한 것은 휘 제영의 증직이 통정대부이니 부인은 증숙부인으로 기록해야 할 것이다. 연안김씨부인의 묘표는 청주군수 영은(泳殷)이 짓고 쓴 묘표로 1943년 9월에 세웠다. 연안김씨 부인의 아버지는 궁궐에서 채소를 가꾸는 사포서(司圃署)의 정6품인 사포(司圃)를 거쳐 의빈부(儀賓府)의 종5품인 도사(都事)이고, 외조부는 안동김씨 가선대부 부평부사 김성동(金誠童:1495년卒)이며 외조모는 좌찬성 강희맹의 딸이고, 좌의정 김질(金礩)의 부인인 영의정 정창손의 딸이 외증조모다.

 

휘 제영의 후손을 과거에는 당진공파(唐津公派)라 하여 1960년 10월 7일에 간행된 파보명은 「당진공파보」였으나, 1989년에 발행한 파보는 휘 제영이 감찰직을 역임하였다고「여흥민씨감찰공(당진공)파보」라고 파명을 변경하였다. 그런데 13세조 담(憺)의 후손이 과거부터 감찰공파(2번파)라 부르고 있었으므로 감찰공파가 둘이 되어 여흥민씨 문중에 혼동이 있다.

 

휘 제영의 장남 사완(思完)은 제용감봉사(奉事)를 지냈는데, 손자 건(楗)과 직(㮨)이 82세, 93세까지 살아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되자 아버지 여개(汝漑)는 가선대부 호조참판의 2품에 증직되고, 조부 사완은 3품인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으며 1596년에 졸하였다. 차남은 진사 사굉(思宏1527년생), 삼남은 교위 사건(思謇), 사남은 행승사랑(行承仕郞:종8품)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좌승지(1802년 족보에는 贈參議) 사령(思寧)이다. 사주(思宙)도 제영의 아들이다. 사위로는 광산인 사의 김질정(司議 金質貞)과 만호 권흠(萬戶 權欽) 그리고 사인(士人선비) 문홍례(文弘禮)가 있다.

 

장남 사완의 후손을 문지파(文旨派), 차남 사굉 후손을 종암파(鍾岩派), 삼남 사건 후손을 추동파(楸洞派), 사남 사령 후손을 사오파(沙塢派)라 함은 모여 살던 지명으로 구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