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동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2-15 (금)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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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고

前 國史編纂委 德植硏究官의 회고 아비규환을 옮겨 싣습니다.

德植宗賢은 奉事公 長派 楗公 10代孫으로 은퇴후에도 閔門의 歷史硏究에 몰두하고 있는 碩學이시다.  

아비규환(阿鼻叫喚)

민 덕 식(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대 비극이었다. 나는 노년이 되어 나를 키워준 내 고향에 대한 보답으로, 2017년에 충북대학교에서 나오는 중원문화연구25집에 朝鮮時代淸州 栗峰驛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 팔결교(八結橋)를 언급하면서 주에다 6.25때 팔결교와 청주 시내의 폭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였다. 서초구청에 다니는 딸애가 이를 보고, 청주 시내에 대한 폭격 자료는 현재 전혀 남아 있지 않음으로, 역사를 전공하니 이를 기록으로 후세에 전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였다. 이에 1950712일 청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언급하려고 한다.

우리나라 중서부의 전략적 요충지에서 벌어진 진천 · 청주지구전투(76~713)1군단(군단장 金弘壹소장) 소속 수도사단 金錫源준장이 최현소장(최룡해의 아버지)이 이끄는 북한군 2사단과 벌린 전투이다. 수도사단은 증원된 2사단 16연대와 20연대, 독립 17연대가 통합된 혼성수도사단으로 진천 남쪽의 봉화산과 문안산 일대에서 저지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격렬한 공방전으로 쌍방간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한 예로 봉화산전투가 있었던 봉화산 아래의 문덕리 미력골마을 일대에서 수집한 전사자의 총기만도 담배 건조실의 반이나 채울 정도였다고 하며, 시체는 국군과 북한군을 막론하고 계곡 웅덩이들에 넣고 묻었기 때문에 지금도 이곳을 조금만 파면 유골들이 쏫아져 나온다. 이때 김석원장군은 포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선두에서 진두지휘함으로써 거듭되는 철수와 행군, 행군 도중의 잦은 재편, 호파기 작업 등으로 저하된 사병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고 한다. 또 미군 전폭기들의 참여도 용기를 주었다. 북한군은 국군을 경시하고 저돌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710일에 10연대가 지키던 구곡리 일대의 방어선이 돌파되고, 711일에는 북한군의 전차가 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남하하여 봉화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1연대(연대장 이희권중령)의 배후를 위협하자, 국군은 모든 부대를 진천에서 청주 팔결천(미호천) 남쪽으로 철수시켰다. 이때 북한군이 국군을 추격해 왔으나 미군 전폭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어서 팔결교를 폭파하였는데, 이 때 굉장한 폭음과 함께 갑자기 방문이 열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곳에는 겨울에는 나무다리를 설치하고, 여름에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나면 나룻배를 이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팔결교를 놓았는데, 이 다리가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이때 폭격된 것이다. 팔결교 뿐만 아니라 미호천에 있는 다른 다리도 폭격되었다. 피난을 하루 늦게 떠난 당숙님의 증언으로는 피난민들이 청주 시내를 떠난 712일 저녁에 팔결천에서는 밤새도록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713일에 북한군이 방어선을 뚫고 팔결천을 건너자 국군은 청주 남쪽으로 물러났다가 보은 방면으로 이동해 부대를 정비하였다. 아무튼 우리 국군은 후퇴하는 어려운 전황 속에서도 용감하게 싸운 것이다. 이에 비해 후일 서울이 수복되고 낙동강 전선에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후퇴던 북한군 패잔병들의 행군하는 모습은 군인이 아니었다.

하여튼 진천 · 청주지구전투에서 국군은 713일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면서, 진천과 청주를 거쳐 대전으로 신속하게 남하 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을 저지시키고, 국군과 유엔군이 금강과 소백산맥을 잇는 지역에서 방어선을 재편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712일에는 청주 시내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도사단이 팔결천에서 막고 있어 북한군은 시내로 들어오지를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내에는 피난민들이 많았다. 우리도 문의 방면으로 가기 위해 시내에 있었는데, 폭격을 피하기 위해 울부짖던 피난민들의 모습, 청주시외버스터미널(본정통에서 옛 청주여고로 가는 길 옆)이 폭격되는 모습, 폭격으로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 헤매던 피난민들의 애처로운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청주시외버스터미널의 폭격에는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폭격 때에서는 사람들은 건물 속으로 몸을 숨길 수가 있으나, 소는 밖에서 노출됨으로 폭격을 받게 되고 이울러 건물 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도 다치게 됨으로 소를 치우라고 야단이었다. 경찰들도 폭격을 피하기 위해 길 바닥에 납작 엎드리곤 하였다. 이때는 길 옆에 거적으로 덮어 놓은 것은 모두 시체였다. 한마디로 청주 시내는 아비규환이었다. 이번 청주 시내에 대한 공중 폭격은 북한군이 청주 시내를 점령한 것으로 오판한 미군 전폭기의 오폭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이때 이 지역의 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우리 가족도 폭격으로 서로 헤어져 어머니가 남문다리 무심천 제방에서 몸부림치며 우시다가 기절을 하시기도 하였다. 나는 홍역을 앓고 난 직후였고, 눈에는 다래끼가 난 초췌한 형색이었으며, 어머니가 내수장에서 사 주신 색동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우리 가족들이 식사할 때 쓸 바가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갑자기 피난길에 나섰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폭격으로 나와 둘째 누님, 큰 조카 딸은 가족과 헤어졌다. 누님은 당시 13세로 젖먹이 큰 조카 딸을 업고 나를 데리고 다녔다. 누님은 집에서 학교만 다니고 외지를 나가 보지를 못하였기 때문에 어수룩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이 때문에 피난민들에게 길을 물어보지도 못하고 철길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충북선의 철길이 청주농고 앞으로 나 있었다. 청주농고를 지나면 철길이 굽어지는 질구지라는 지점이 된다. 우리 큰 눈님이 우리들을 찾으려고 뛰어다니다가 셋이 철길을 따라 정하역 쪽으로 걸어갔다는 피난민의 말을 듣고 철길을 따라 쫒아오고 있었는데 마침 질구지에서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질구지는 내가 청주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를 기차통학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지나던 철로길이다. 질구지만 지나면 철길이 굽어지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만약 여기서 누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철길을 따라 정하역을 거쳐 오근장역으로 가게 된다. 오근장역은 팔결천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격전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남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즉 우리는 엉뚱하게 반대로 격전지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큰 누님은 친척들이 모일 때면 피난 때 우리들을 질구지에서 찾은 것은 천운이라고 자랑처럼 말씀을 하시며, 그때의 일을 회상하곤 한다. 이제는 큰 누님이나 둘째 누님 모두 80대의 고령들이시다.

바로 위 셋째 누님도 폭격으로 가족과 헤어졌다가 다행히 앞집 친척 어른을 만나 이들 가족을 따라가서 피난을 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 누님은 어리지만 당차서 당황하지 않고 친척 어른을 따라가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의 손에는 피난 갈 때 가지고 간 오빠의 구두가 들려 있었다. 어머니는 이 딸을 잃고 하루도 우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청주 시내를 빠져나온 우리 가족은 문의에 있는 어느 마을에서 자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교회와 옹기점이 있었다. 내가 젊어서 두루봉 구석기유적을 발굴할 때 유적이 있던 마을이 가련이라는 마을이었다. ‘가련이는 우리 숙모님의 친정마을이었다. 정조 때 유명한 표암 강세황선생의 후손들로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피난 때의 이야기를 하니 우리가 묵었던 마을이 바로 아랫마을이라고 하였다. 이 때 교회에서는 피난민들이 울면서 소리 내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 눈물은 절박했던 피난민들의 절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시 나는 어려서 피난민들이 왜 주님을 외치면서 절규하며 흐느끼는지를 잘 몰랐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나도 울었다.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비극을 안겨준 주체는 오늘날 봉건왕조를 이루고 대를 이어 세습을 하며 건재하는 것을 보면, 역사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만든 비극이니, 이럴 때면 중생들에게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강조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새삼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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