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동정
작성자 민덕식 전 국사편찬위원
작성일 2019-04-29 (월)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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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文景公) 민영모(閔令謨)의 묘소

 문경공(文景公) 민영모(閔令謨)의 묘소(1)

 글쓴이 : 민덕식 전 국사편찬위원

 

고려 전기에 양광도 충주목 황려현(여주)의 토성(土姓)이었던 여흥민씨 가문에는 민가거(閔可擧) 가계(家系), 민칭도(閔稱道) 가계 등 여러 가계들이 있었다. 이중 민가거 가계, 민칭도 가계, 민창수(閔昌壽) 가계, 민경지(閔慶之) 가계, 민세륜(閔世倫) 가계, 민각(閔角) 가계 등은 전기에 이미 중앙으로 진출하여 관인층(官人層)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민가거 가계는 전기에 여흥민씨 가문을 대표하게 되고, 민칭도 가계는 후기에 여흥민씨 가문을 대표하였다. 민칭도 가계의 중시조인 문경공은 하급관인층에 머물고 있던 민칭도 가계를 권문세족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아들인 민식, 민공규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었다.

 

여흥민씨세보에는 민영모의 단소(壇所)는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사창리에 있다고 하였다. 민사의(閔師毅)가 찬한 「文景公閔令謨社倉祭壇奉審記事」에는 박구상(朴龜祥)의 집 뒤에 고총(古塚)이 있어 민정승의 묘소라고 전하여 오고, 그 아래 좌우로 두 기의 고총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어유진(魚有珍)이라는 사람이 이 묘지를 매입하여 집을 짓게 되었는데, 집터 언덕에서 침식부패물(侵蝕腐敗物)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하였다. 이 지점이 묘실 바닥으로 추정된다. 영조 24년에 민경유(閔景游)가 어씨의 집을 찾았더니 여기서 습득한 묘지석(墓誌石)의 파편 1개를 보여 주었다. 묘지석 파편에는 「閔令謨」라는 3자가 있었는데, 민경유는 이를 보고 깜작 놀라서 이 사실을 제종인(諸宗人)들에 알리고, 묘지석 파편은 소경공파(少卿公派) 민효대(閔孝大)의 집에 보관하였다고 하였다. 또 영조 41년 3월에 재경종인(在京宗人)들이 발의하여 민명신(閔命申)과 민백구(閔百龜)를 충주 사창(社倉)의 현지에 파견하여 10여 일을 탐색하였다. 이 때 조사한 내용은 고총 3기는 어가(魚家)의 화체(花砌)(민영모의 묘지 추정 지점)와 박상건(朴尙健) 집 뒤, 유복만(劉福萬) 집 뒤에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또 유복만은 어씨(魚氏)의 노비로 전에 밭을 갈다가 땅속에서 은(銀) 누만(累萬)을 발굴하여 부자가 되어 노비를 면하고 상경하여 위장(衛將)의 공명첩(空名帖)까지 얻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은 무덤 속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박구상의 가옥을 지을 때 동쪽 부엌 터를 닦다가 난석중(亂石中)에서 석편 한 개를 얻었는데, 이 비석 편을 조사하여 보니, 비석은 좌방(左傍)과 상하 양면이 모두 떨어지고 우방(右傍)만이 온전한데 중간에 2행 7자가 있었고, 1행에는 민영모의 휘자(諱字)와 벼슬 4자가 약간 그 머리가 떨어졌으나 자형(字形)은 완연하였고, 2행에는 「延延敷」 3자가 있었고, 연자(延字) 위에도 일말점획(一抹點劃)이 있었으나 판독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어 민백구가 청풍 수령으로 있던 경암(警菴) 민백순(閔百順)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자, 민백순이 이곳으로 달려와서 살펴보고 전 승지를 지낸 민광우(閔光遇)와 함께 어씨를 찾아가서 그 땅을 사기를 청하였다. 또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고비(古碑)를 마구 깨트려서 우물 속에 넣었다고 하므로, 마을 동쪽에 있는 우물을 조사하여, 우물 축석 사이에 끼어 있는 비석 파편 한 개를 찾아냈다.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웠고 씨자(氏字) 위에 희미하게 배자(裵字)로 보이는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민영모의 배위(配位)인 배씨로 판단 민영모의 묘비편으로 추정하였다. 또 창고(社倉) 남쪽 우물에 쌓인 돌 사이에서 향로석(香爐石)도 찾아냈다. 이때 민백순은 어씨에게 돈 350민(緍)을 주기로 문권(文券)을 작성한 후 경중(京中)의 제종인(諸宗人)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성금을 받아 가대(家垈)를 지급하였다. 또 영조 42년 3월에도 충주에 거주하는 민혁수(閔赫洙)가 현몽(現夢)으로 인하여 어씨 집터에서 지석(誌石) 1편을 찾았는데 석체(石體)와 자양(字樣)이 전 것과 같이 바르고 서로 비등하였다. 사방이 결실된 가운데 4행 12자가 확인 되었고 초행에는 「賜祭賻」가 있고, 위에도 1자가 있었으나 판독을 할 수가 없었으며, 또 차행(次行)에는 「里之原公」 4자가 있었고, 또 차행에는 「捷慨」 2자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사창 창고터(庫墟)보다 조금 높은 장소를 택하여 높이 4척, 지름 5척 규모의 배축향미(背丑向未)의 묘단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첫째, 민영모의 묘지석 파편이 습득된 어유진의 집터가 민영모의 분묘라고 추정되며, 집터의 언덕 부분에 묘실(墓室)이 있었고, 석실분이었던 묘실은 이미 파괴되어 없어졌지만,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묘실의 바닥에서 침식부식물들이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고분을 발굴조사하여 보면 시신이 있던 바닥에서 부식된 유기물들이 많이 출토된다. 즉 민영모의 분묘는 집터의 언덕 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래 부분에 2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들 고분은 고분의 배치로 보아 민영모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으며, 여흥민씨세보에 고노상전(古老相傳)에 1남인 민식의 묘소가 부친의 묘소 아래에 있었다고 한 것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또 이렇게 되면 나머지 한 고분도 2남인 민공규의 분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곳은 여흥민씨를 일으킨 주인공들이 잠든 묘역인 셈이다.

 

둘째, 민영모의 분묘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으로부터 앞쪽의 박구상의 집터에서 민영모의 묘비편(墓碑片)이 발견되었다. 묘비가 세워졌던 위치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셋째, 이들 고분은 마을 사람인 유복만에 의해 도굴되었다. 고려의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이므로 입구만 찾으면 연도를 통해 묘실까지 쉽게 들어가 도굴을 할 수가 있다. 도굴품 중에는 고려청자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민영모의 묘실은 12세기 말에 축조된 것이므로 상감청자의 시기였다. 민식도 마찬가지이다. 민공규의 묘실은 13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므로 상감청자의 전성기였다. 유복만은 이들 도굴품들을 팔아 거부(巨富)가 되었고, 이 돈으로 면천(免賤)은 물론 관직까지 받았다고 한다.

 

넷째, 민영모의 묘실은 바닥 부분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묘역(墓域)의 중심을 이루는 고분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도굴을 당하고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2기의 고분은 유복만에 의해 도굴을 당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 묘실이 남아 있었다가 도굴 후 파괴 된 것으로 추정된다. 파괴 된 고분의 돌들은 마을의 우물 등을 만드는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문경공의 배위는 경주배씨(慶州裵氏)로 추밀사 배유(裵裕)의 따님인데, 이곳에서 출토된 묘비편의 배씨와 일치하고, 『고려사』 열전과도 일치한다.

 

한편 『氏族源流』와 『列聖王妃世譜』에는 민영모의 묘소가 평산(平山)에 있고, 표석(標石)이 있다고 하였다. 앞서의 사창리는 금석문을 바탕으로 하는 당대의 1차 사료이고, 평산은 문헌을 바탕으로 하는 후대의 2차 사료라고 볼 수가 있는데, 1차 사료가 2차 사료보다 신빙성이 높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끝으로 도굴을 당한 후 무참하게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식과 민공규의 단소도 문경공 단소의 아래쪽 좌우에 조성하여 본래대로 3총(塚)을 만들어서 문경공의 시제 때 함께 시제를 올려 드리는 것이 바람직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단소에는 민식의 사돈인 대문호 이규보(李奎報)가 민식과 민공규에게 드리는 시의 시비(詩碑)도 함께 세워 드리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민영모, 민식, 민공규는 여흥민씨가 권문세족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 해준 조상들로 그들의 공적은 높게 평가 받아야 한다. 오늘날 학자들이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들을 언급할 때 여흥민씨를 반드시 넣는 것도 문경공 부자의 덕분이라는 점을 자손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문경공을 우리의 중시조라고 불러도 하나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아드님들도 부친의 묘역에 묻히기를 원했을 것이다. 즉 사창리는 여흥민씨를 이끈 삼두마차의 주인공들이 잠든 우리 민문의 성지(聖地)라고 볼 수가 있다.

 

 

 

문경공(文景公) 민영모(閔令謨)의 묘소(2)

 

문경공의 묘소가 있는 음성군 금왕읍은 옛 금왕면인데, 무극(無極)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무극은 고려시대의 무극역(無極驛)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은 음죽현(陰竹縣)이었다. 무극역은 문경공의 묘소에서 10리 거리인 음성군 생극면 관성리에 있었는데, 육지측량부의 1915년 측도 5만분의 1 지형도에는 무극역에서 각회리, 덕동, 지소리를 거쳐 묘소에 닿게 되어 있다.

 

역참(驛站)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명령 계통을 확립하기 위하여 설립한 교통시설이었다. 설치목적은 왕명(王命) 및 긴급한 군기사항(軍機事項)의 전달, 봉명사신(奉命使臣)의 왕래에 따른 영송지대(迎送支待), 진상(進上) · 공부(貢賦)의 운송에 있었다. 고려시대 광주도(廣州道)에 속해 있던 무극역은 개경의 청교역에서 임진의 통파역, 봉성의 마산역, 고봉의 벽지역, 남경의 연서역, 광주의 덕풍역 · 경안역, 이천의 오행역 · 안리역, 음죽의 무극역, 괴주의 안부역(수안보)을 거쳐 계립현(鷄立峴)을 넘어 영남으로 통하던 역로(驛路)였다. 조선시대에도 무극역은 영남대로에 속해 있었다. 즉 한양에서 한강나루를 건너 양재, 판교, 용인, 양지, 무극역, 충주를 거쳐 조령(鳥嶺)을 넘어 부산으로 통하였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기반을 구축할 목적으로 교통망을 정비, 통제하기 위해 1906년에 '도로개수 계획'을 세우고 식민통치 목적에 따라 노선을 변경하였다.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경부선 도로는 송파진(松坡津) 대신 광진(廣津, 광나루)을 건넌 후 오늘날 천호대로를 따라 하남시 덕풍동, 광주시 경안동, 이천, 장호원 방향으로 변경하였다. 이로써 조선시대 영남대로상에 위치하여 번영을 누렸던 노변취락(路邊聚落)들은 자연 위축되게 되었다. 50여년 전에 방학 때 음성 누님댁을 들려 집으로 가려면 천호동에서 시외뻐스를 타고 비포장 국도를 따라 경안, 이천, 여주, 장호원, 감극, 생극, 무극, 음성까지 6시간이 걸렸다. 이 도로가 앞에서 언급한 고려시대 광주도의 역로였다. 하여튼 고려시대에 문경공의 묘소를 참배하려면 오늘날의 개성에서 출발하여 임진나루를 건너, 고양, 서울, 광주, 이천, 장호원, 무극의 묘소에 닿게 되며, 문경공의 묘소는 이러한 역로 덕분에 생각보다 아주 궁벽하고 외진 곳은 아니었다.

 

또 문경공 묘소가 있는 사창리는 사창(社倉)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사창은 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촌락에 설치된 곡물대여 기관이다. 향촌 자체의 민간 빈민 구호 기관의 성격을 지녔다. 사창의 설치는 한정된 관곡(의창곡)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궁핍한 백성에 대한 진휼을 계속하려는 국가의 강력한 의지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러한 사창제는 세조 7년에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문경공의 묘소가 있던 마을에는 사창의 창고가 있었다. 즉 고허(庫墟)보다 조금 높은 장소를 택하여 문경공의 묘단을 설치하였다는 말이 이것이다.

 

아무튼 문경공 묘지의 입지 선정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교통체계인 역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고려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볼 수가 있다. 고려시대의 교통수단으로는 말을 많이 이용하였는데,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말이 죽자 말을 빌려서 타고 다녔다는 것이 당시의 상황을 말해 준다. 충순공(忠順公) 민종유는 말을 좋아하는 성벽이 있어서 남에게 좋은 말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말을 사다가 항상 문 앞에 매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사랑스럽게 보았다고 전한다. 또 文順公(문순공) 민적은 눈썹이 그린 듯하였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를 사랑하였으며, 자질과 외모가 아름다워 멀리서 보면 신인(神人)과도 같았다. 그가 말을 타고 나타나면 그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수레 덮개가 하늘을 덮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문온공(文溫公) 민사평도 「與門生出游東郊」라는 시에서 문생들과 동쪽 교외에 나가 말을 타고 사냥을 할 때 사냥에서 얻은 것을 사람들이 묻는다면 포의(布衣)로서 문생들을 거느렸다는 자부심일세라고 하였다. 말이 없는 일반인들은 걸어서 이동을 하였는데, 예전에는 새벽 일찍 일어나 하루에 150리를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60리 길의 5일장에 나가 소를 매매하고 돌아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이에 비해 마행(馬行)의 하루 일정은 평균 60리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 문경공의 묘소를 고향인 여주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고향의 외곽에 마련한 것은 고향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들 민식이 고향 사람들과 혼인을 맺은 것을 보면 12세기까지는 비록 상경종사(上京從仕)하고는 있지만, 고향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여주가 역로의 길목에 있기 때문에 문경공의 묘소를 오갈 때 편하게 고향을 방문하는 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점도 문경공 묘소의 입지를 선정하는데, 고려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선조들은 상경종사하였기 때문에 개경에 집들이 있었다. 특히 민종유는 만년에 거문고와 퉁소를 좋아 하였으며, 집안의 정원에 화초를 많이 가꾸어 놓고 풍류와 노래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아들 민적도 개경의 동남쪽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는데, 원림(園林)이 깊고도 조용하여 이름을 운미(芸齋)라고 짓고, 운미거사(芸齋居士)라고 자호(自號)하며, 집안에 동산을 만들고 꽃 시절마다 손님을 맞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짖고 금(琴)을 타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민종유의 장인인 유천우(兪千遇)는 정원을 화려하게 꾸며 놓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원종은 유천우의 집 정원 안에 있는 정자에 놀러갔는데, 이 때 세자가 따라가서 놀면서 그 곳의 경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움을 보고 시 한 수를 지어 남기었다. 이에 유천우와 여러 문신들이 세자의 시운에 맞추어 시를 지어 올린 일이 있었다. 정원을 가꾸는 전통은 앞에서처럼 사위인 민종유와 외손인 민적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또 민적의 아들 민사평도 당시 김륜 · 이제현 · 정자후가 같은 마을에 살아서 철동삼암(鐵洞三菴(岩))이라고 했는데, 충목왕 4년에 김륜이 세상을 떠나자 사위인 민사평이 그 집으로 이사를 와서 살게 되어 삼암이라는 칭호가 끊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민사평은 대전 명기(明基)종현이 지적한 대로 이포대교가 있는 여주시 금사면에 집이 있었다. 여기에는 전장(田莊)도 딸려 있었을 것이다. 민사평의 딸은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로 김구용(金九容)의 모친이다. 영흥군부인은 효심이 대단하여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하였고, 피난 후에는 여주에서 10여 년을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가 살고 있던 여주에 산소를 모시고, 가족들의 상경하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주에 살면서 어머니의 산소를 돌보다가 56세로 세상을 뜨고, 어머니 묘 옆 서쪽 10 수보(數步)에 묻혔다. 이처럼 선조들은 개경과 고향인 여주에 집과 전장이 있어 왕래하면서 지냈다. 사실 고향인 여주에는 상경종사하지 못하는 여흥민씨 가계들이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었다. 일부는 황려현 읍사(邑司)의 호장과 부호장을 세습하는 향리직을 맡아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이들 향리와 자제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관인층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여흥민씨들은 본관인 여주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하다못해 과거의 향시(鄕試)를 보려고 해도 반드시 본관인 여주에 와서 보아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태조대에 나라에서 본관인 토성(土姓)을 정해 주고 통제를 하였기 때문에 친고조 8촌간인 친족관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가 멀어지면서 여러 가계(家系)들이 분파(分派)되었지만 본관 자체를 바꾸기는 어려웠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 민씨들은 모두 여흥민씨이고, 여흥민씨 가문에는 여러 가계들이 있었다. 여흥민씨 가문에는 민칭도의 가계만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소박한 생각이며, 이는 조선시대에 와서 족보를 만들 때 민칭도 가계만의 족보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성씨들의 족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른 가계에 대한 대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문경공의 묘역은 문경공을 중심으로 아들인 민식과 민공규의 무덤이 함께 있는 가족묘의 형식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문경공의 묘비편에서 배시(裵氏)라는 글자가 확인된 것을 보면, 문경공의 무덤은 당시의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에 부부가 안장된 합장묘의 형식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는 민식과 민공규의 무덤도 동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로 내려오면 변화가 보인다. 즉 민종유의 묘는 위치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개경 부근이라고 하며, 아들인 민적의 묘는 별도로 경기도 장단에 있었다. 민적은 송림현(松林縣) 초원(椒原)에 장사하였다. 송림현은 태종 18년에 임강현에 귀속되었다. 세종은 29년 7월에 경기감사에게 유시하여 임강현에 있는 민적의 분묘 동구(洞口)에 숙박시설인 분지천원(芬地川院)을 옮겨 짓고, 스님들을 살게 하여 산불 금지에 대비하라고 하고, 원우(院宇)는 반드시 길가에 지어서 행려(行旅)에 편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분지천원이 있던 분지천이 장단현의 읍치에서 서쪽으로 15리에 있었기 때문에 분묘의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제강점기 때 장단에 있는 분묘는 도굴을 당하고, 묘지석은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이들 부자는 가족묘가 아닌 별도의 묘역을 설정한 것이다. 또 민사평은 경기도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남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이곳 대덕산 언덕은 민사평의 장인인 김륜의 묘역이었다 이색이 찬한 『閔思平配金氏墓誌』에는 언양군부인(彦陽郡夫人) 김씨를 여흥군 남쪽에 있는 발살(鉢山, 명성황후 생가 뒷산인 黃鶴山)의 서쪽 민사평의 묘에 장사지냈다고 한 것을 보면, 민사평은 그 후 고향인 여주로 이장된 것을 알 수가 있다. 민사평의 아우인 민변의 묘는 개성 서쪽 웅곡 전포에 있는 감로사의 동쪽 삼수리에 에 있었는데, 앞에는 장인인 문정공 허백(許伯)의 묘가 있고, 뒤에는 배위인 양천현부인 허씨의 묘가 있었다. 민선(閔璿)의 묘도 장인인 최문도(崔文度)의 묘가 있는 덕수현(德水縣) 옥금산(玉金山)에 있었다. 이처럼 후대가 되면 민사평, 민변, 민선처럼 장인의 묘역에 묻히는 현상도 나타났다.

 

끝으로 이곳 사창리의 묘역에 잠든 민영모, 민식, 민공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로 고관대작을 지낸 인물들이었다. 민영모와 민공규는 재상에 오르고, 민식도 좀더 오래 살았으면 정승에 까지도 오를 수 있는 인재였다(德植 : 전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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